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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휘 자미(子美)의 약술

 

순흥안씨의 시조 휘 자미(子美) 선조의 생졸 연도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며 1)흥주현에서 탄생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고려 2)흥위위에서 3)보승별장을 지냈고, 뒤에 증손인 문성공 휘 향(珦)이 귀하게 되어 4)신호위 5)상호군으로 추봉되었다.

 

순흥안씨 족보에 전해오는 상대 선조의 출생 시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시조 휘 자미의 장남 추밀원 부사 상호군 휘 영유(永儒)는 1201년(신종 4) 출생하였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 된 것이다. 이하 3세 태사공 휘 부(孚)는 1220년(고종 7), 4세 문성공 휘 향(珦)은 1243년(고종 30), 5세 문숙공 휘 우기(于器)는 1265년(원종 6), 6세 문숙공 휘 목(牧)은 1290년(충렬왕 16) 출생하였으며 이상이 1파의 계보이다. 다음 2파와 3파 선조의 출생연도는 2파 5세 문의공 휘 문개(文凱) 선조는 1273년(원종 14), 3파 6세 문정공 휘 축(軸) 선조는 1282년(충렬왕 8), 6세 문경공 휘 보(輔) 선조는 1302년(충렬왕 28) 출생하신 기록이 있다.

 

시조공의 생년이 일부 문헌에 1182년(명종 12)으로 되어 있으나 근거가 확실하지 않으며, 6)위와 같은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시조는 1170~1180년경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우리 순흥안씨 역사는 2020년 현재까지 약 86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조공의 배위와 묘소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으므로 앞으로 적극 연구해야할 과제이다.

후손 기명(其命)이 만든 『갑신파보』에서 진위에 사는 종인의 가첩에 의거하여 이르기를, “공의 묘소는 순흥부 동쪽 영마암(永磨巖)에 있으며 배위는 압해 정씨(押海丁氏)로 추밀부사 광서(光瑞)의 따님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전 족보에 실려 있지 않던 것이다. 이제 영천의 정원욱(丁元旭)의 집안 구 족보를 보니 진현관대제학 문하시중을 지낸 경(瓊)과 그의 아들 옥당박학사 문하시중평장사 윤화(允樺)와 그의 아들에 문하시중 평장사 태보내사령 혁황(奕煌)과 사위에 '안자미(安子美)'가 기록되어 있으며 외손 기사에 추밀공 영유(永儒)·태사공) 부(孚)·문성공 향(珦)의 휘 자가 연이어 올라 있다. 그러나 신중히 해야 하는 도리 상 곧바로 올릴 수가 없으므로 7)여기에 기록한다.” 하였다.

 

묘소도 실전하여 17대손 순원군 휘 응창(應昌)이 1654년(효종 5)에 영주시 순흥면 평리촌 203번지에 시조공과 3세 태사공의 제단을 축조하고 향려단(鄕閭壇)이라 명명하였다. 이것이 우리 안씨가 추원단을 조성한 시초이다. 이후 2파의 산파단(山坡壇), 3파의 대산단(臺山壇), 판관공 파조 휘 신(愼)의 오산단(梧山壇)을 조성하여 각각 세사를 올리다가 오늘날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413-11에 합단한 추원단을 성역화 하여 매년 음력 10월 1일 세사를 봉행하고 있다.

 

시조공은 지금의 순흥인 흥주현에서 태어나셨으므로 흥주(興州)를 본관을 삼아오다가 순흥으로 개명하여 순흥안씨로 불리고 있으며, 시조 공 이전의 역사에 대하여는 1546년(명종 1, 병오) 문간공 휘 8)현(安玹)이 문중에서 처음 발간한 족보인 병오보 서문에서 이전 역사를 기록할 수 없었던 사유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시조 이전의 가첩이 전하지 않아서 기록을 다하지 못한다. 이런 점이 오늘날 한없이 슬프다. 지금 족보를 수정하지 않으면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라고 하였다. 우리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시조공 휘 자미(子美) 선조 이전에도 우리 선대가 계셨을 터인데 병오보 서문처럼 더 이상 선대의 사적을 알지 못하는 당시 선조님들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시조공은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휘 영유(永儒)의 후손은 1파로, 차남 휘 영린(永麟)의 후손은 2파로, 삼남 휘 영화(永和)의 후손은 3파로 불리면서, 다시 1파 14개 파, 2파 4개 파, 3파 4개 파 총 22개 파로 분파되었다.

 

 

 

1) 흥주현(興州縣) : 순흥의 옛 지명은 흥주(興州)ㆍ흥녕(興寧)이라 불렸으며 이에 따라 흥주안씨ㆍ흥녕안씨라고 하다가 1348년 순흥이라 불리게 되어 순흥안씨라 하고 있다.

2) 흥위위(興威衛) : 고려시대 6위(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의 하나로 주로 전투부대였다.

3) 보승별장(保勝別將) : 고려시대 무관직 7품 종2품(왕명출납 궁궐경호)

4) 신호위(神虎衛) : 고려시대 중앙군의 2군 6위가운데 하나, 좌우위, 흥위위와 함께 3위라 불리는 부대로 995년(성종14)에 정비되었다. 개경의 수비를 주로 맡았다 신호위는 7,000명의 군사를 보유하고 있다.

5) 상호군(上護軍) : 고려시대 정3품 무관직(오늘날 수도방위사령관)

6) 『순흥안씨대감 상』. 박영사. 2012. p 9.

7) 『순흥안씨 일파족보(경신보)』 권1.

8) 안현(安玹) : 순흥안씨 족보를 처음 간행하고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이다. 시조의 14세로 문희공(安瑋)의 아우이다. 자는 중진(仲珍)이고 호는 설강(雪江)이다. 1521년(신사)에 형인 문희공 안현(安瑋)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고 1548년 한성부 판윤(현 서울시장)을 지냈고 1551년 병조 판서에 올라 국방의 총책임을 맡았고 1553년 이조 판서가 되었다. 1558년 우의정에 이어 관직이 거듭 올라가자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정1품), 영경연감(領經筵監), 춘추관사(春秋舘事)를 겸하였다. 공은 세 왕조(王朝)에 걸쳐서 세 번이나 청백리(淸白吏)에 선정되었다. 우리 순흥안씨로서 특기할 것은 전술한 대로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백방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우리 순흥안씨의 족보를 백형인 문희공 안위(安瑋)와 처음 간행한 분으로서 어려운 일을 해낸 선조이다. 지금 삼청동(三淸洞) 유래설에 순흥안씨 14세 안현 선조가 중종, 인종, 명종 삼조에 걸쳐 세 번씩 청백리에 올랐다하여 사시는 곳을 삼청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1560년 60세로 돌아가니 근학호문(勤學好問)하니 문(文)이요, 일덕불해(一德不懈)하여 간(簡)이라 하여 문간(文簡)이라 시호를 내렸다. 조선시대 청백리록에 오른 순흥안씨는 3명으로 안현(좌의정), 안잠(安潛 별좌), 안자유(이조 판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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